교통분야에서 정의는 누구를 위한 정의일까? 정의는 누가 만드는 것일까? 이에 대한 답은 어떤 프레임으로 보느냐에 따라 무수히 많을 수 밖에 없다. 본 글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 중 ‘정의’와 ‘집단지성의 위대성’에 대한 언급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덧붙여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책을 읽으면서 추가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을 교통하는 분들을 위해 정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기의 스승인 플라톤과 생각이 달랐다. 스승인 플라톤이 ‘열정’, ‘이상’, ‘신비’를 추구했다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냉철’, ‘합리’, ‘형상’을 강조했다고 한다. ‘형상’은 눈에 보이는 큰 그림이라 생각된다. 도시 전체를 보는 그림, 혹은 교통네트워크의 얼개를 관조적으로 그려낸 그림으로 보면 될 듯 하다. 비슷한 맥락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형태’와 ‘조화’, 그리고 ‘자연’을 중시하는 논리를 피력하려고 했다. 통치기술도 같은 맥락에서 규정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통치기술이란 “국가내에서 제 세력간의 균형을 발견하고 조절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해관계의 입장을 잘 파악하고 조절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조화와 균형을 접하면서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교통분야의 전문가들은 이해관계자들의 욕구를 듣고, 그 욕구들의 맥락과 해결, 이해관계의 충돌의 접점을 읽어내는 노력을 충실하게 하고 있을까 질문하고 싶다. 숫자의 힘에 이끌리지는 않는지, 전문성이 있다고 전제적으로 가고 있지는 않은지, 사업의 성공과 입신양명의 욕구때문에 자기의 강한 주장을 양보하는 경우가 생기고 있지는 않은지. 지대추구이론이 설명하는 것처럼 공공에 빨대를 꼽는 일은 없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균형을 잡는 것, 그리고 조절하는 것, 조절을 위해서 설득을 열심히 하는 것 등은 교통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지속적으로 풀어내야할 과제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질서의 원리’를 ‘정의의 관리’에서 찾고 있다. 정의는 국가내의 사람들을 결합하는 힘이며 질서의 원리라는 것이다. “부와 자유 없이는 존립할 수 없으며 정의와 용기없이 선(善)한 생활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선한 생활의 조건이 정의이며, 이 정의로운 정신의 지향이 국가의 질서를 확립케 한다는 주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은 공식을 만들 수 있다. “선 = 정의 = 공동이익 = 국가의 질서 확립”이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평등의 정당성도 공동선과 국가의 이익과 연결하여 고려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교통서비스를 이용하는 모든 시민들도 선해야 하겠지만 교통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든 전문가나 현장의 제공자들도 선함을 모토로 해야함을 짐작할 수 있다. 아리스트텔레스의 책 「정치학」을 읽으면서 느껴지는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은 ‘선함’, ‘덕’, ‘지혜’, ‘여유’ 등이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으면서 교통하는 분들이 명심해서 추구해야할 철학을 성찰한다면 이러한 정신들(선함, 덕, 지혜, 여유)이 아닐까한다.
다음으로 ‘집단적 위대성’을 ‘집단지성’과 연결시켜 살펴보고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혜를 가진 천재적인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참주, 군주 정치보다는 집단의 의견이 반영되는 민주정치의 의사결정 체계를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본디 불합리하고 공포에 떨며, 권력의 측면에서는 잔인하고 탐욕한 것으로 표현할 수 있지만 집단적 위대성을 발휘하는 하나의 유기적 실재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이러한 논리는 집단지성의 위대성으로 연결할 수 있으며, 민주성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선함, 덕의 작은 누적들이 모여서 긍정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주장하는 똑똑한 사람에 의한 정치에 대해 동의하지 않으면서, 적극적으로 맞서는 논리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을 강조하고, 소수가 많은 대중의 것을 박탈하면 안된다고 보면서, 대중들이 주권자여야 한다고 보았다. 교통에서도 소수에게 혜택을 주는 것은 다수의 권리나 빵을 뺏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교통하는 사람들은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집단적 위대성에서 어떠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첫째, ‘집단지성의 위대성’을 성찰할 수 있다.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집단지성의 결과가 만들어질 수 있도록 누군가가 안내하는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이 먼저 떠오른다. 교통을 가르칠 때, 교통영역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설득력을 가지려면, 집단지성을 모아내고,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도록 설득하고, 논의를 자연스럽게 이끌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 ‘민주성’과 ‘보편성’의 소중함이다. 모두를 위한 정치도 필요하고, 모두가 참여하는 정치의 보장도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수결의사결정원칙이 만병통치약이라고 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적인 공학의 영역, 인권의 문제, 소수자의 문제 등과 같은 것은 다수결로 결정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제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민주성과 보편성을 지향하는 것은 작금의 우리나라 상황에서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셋째, 다수의 의견, 국가의 대부분 구성원의 뜻이 모여질 때는 큰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중요한 예의일 수 있겠다는 것이다. 자기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합리적 근거를 더 준비하고, 설득력도 더 키우고, 지지세력도 확보하는 사전 노력이 필요함을 느끼고, 패러다임 전환가능성을 지켜보며 기다리고,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복종할 줄 아는 자가 통치할 줄 아는 자”라고 표현한다. 국가이익과 공동이익에 순응 할 줄 아는 자가 통치할 줄 아는 자라고 강조한다. 그 공동이익 추구는 선과 정의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다. 다수의 의견을 중요시하고, 순응할 줄도 알며, 때를 기다렸다가 뜻을 펴는 노력이 필요할 때라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