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교통이 정의론과 만나면
대중교통이 정의론과 만나면
  • 황경수 교수
  • 승인 2019.08.29 11:1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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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교통이 정의론과 만나면

 

황경수 교수(제주대학교 행정학과)
황경수교수
(제주대학교 행정학과)

대중교통에 대한 이야기는 누가 어떤 입장에서 이야기하느냐에 따라 많이 달라진다. 이해관계자에 따라 다르고, 지역마다 다르고, 나이와 직업구조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공직자와 의회 의원님의 의견이 다르고, 버스업체와 종사자의 이야기가 다를 수 있다.

이야기 범위를 한정하고, 논의의 기준을 잡으면 그 다양한 이야기들도 조금은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샌댈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의 분석틀과 최진기 교수의 논의를 참고하여 다양한 측면의 입장들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 어떨까? “국가와 지방정부는 왜 대중교통에 지원해야 하는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는?”

 

 

첫째, 자본주의와 자유지상주의적 입장에서는 기업이 흥하면 그 결과는 기업에게 돌아갈 것이고, 그 기업이 망해도 할 수 없다고 볼 듯하다. 이 입장에서는 개인의 권리가 중요하고, 따라서 사업의 결과는 그 사람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라 본다.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며, 경쟁과 도태를 전제로 할 것이다. 개입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으니 자제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질문은 자동차를 못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집에만 있어야 할까? 차가 없어 직장을 갈 수 없으니 직장 옆 어디에서라도 자야하는 것일까? 도심으로 가야만 할까? 슬럼이 만들어 지는 것에 대해서 두고만 보아야 하는가? 하는 등의 질문을 할 수 있겠다.

둘째, 다수결에 부쳐서 결정하는 민주주의적 입장에서는 선거와 주민투표, 설문조사결과를 중시하여 결정할 듯 하다. 대통령과 도지사가 공약으로 내걸어서 당선이 되면, 그 범위내에서는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가지게 된다. 다만 다수결의 투표도 인권, 전문가적 판단, 소수집단 의견에 대한 배려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과학기술의 가능성을 투표로 결정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인권과 소수의 보호를 다수결로 결정하는 것도 어색할 수 있다. 다수가 좋아하면 가치가 있는 것인가? 좋은 것이 모두 옳은 것은 아님을 우리는 항상 상기시켜놓고 있다. 버스중앙전용차로와 유턴 허용은 가능할까라는 교통공학적 접근을 다수결로 결정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공학영역이니 주민들은 그대로 따르시오라고 명하는 것도 성숙한 주장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 제주도 선거에서는 도지사 공약으로 대중교통체계의 개선과 준공영제 실시에 대한 내용이 있었을까? 없었을까? 그 여부도 대중교통에 대한 지원정책에 신뢰를 부여할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셋째, 공리주의 입장에서는 대중교통에 대한 지원을 다수의 이익으로 연결시키면 될 것이라고 본다. 이해관계자의 입장도 고려하고, 버스이용객의 상황도 고려하여, 공공의 지원이 부가가치창출의 효과가 있기를 바란다. 제주도 대중교통운영에 의한 사회적 편익이 높다면 이 또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가 될 것이다. 그 편익을 계산해내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관광객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 교통혼잡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인가? 대기오염과 미세먼지 감소로 환경적 차원에서 이익이 있을 것인가? 등에 관심을 가진다. 개인의 편익, 시스템 편익, 사회적 편익으로 나누어 기준을 잡는다면 이 공리주의는 사회적 편익의 입장에서 보자는 측면도 있지만 개인의 편익의 합을 키우자는 주장일 수도 있다. 여기에서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대중교통지원으로 편익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회사나 고객들은 제외시켜야 하는가?라는 질문이다. 이 부분에서는 이익으로만 세상을 보아야 할 것인가?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넷째, 능력껏 일하고, 필요에 의해서 분배와 소비하자는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는 대중교통이 꼭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것을 따지지 않고서라도 지원해주어야 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지방정부의 능력, 대통령이 능력이 있다면 투자를 하고, 그 소비는 대중교통이 있어야만 움직일 수 있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불공평하다고 말 할 수도 있다. 세금은 누가 내고, 이익은 누가 보는가라는 질문을 하게된다. 이 마르크스주의는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가정에서 인정받는 철학이다. 부모님들이 능력껏 일해서 벌어오고, 그 돈은 정말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노동이 없더라도, 돈을 못벌더라도 조건없이 쓰게 되는 구조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는 정의(justice)가 필요없는 것일까? 본격적인 질문은 마르크스주의의 가정처럼 능력껏 일해서 세금을 내고, 그 세금으로 대중교통이 없으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이용하도록 배려해주면 안될까하는 질문을 할 수 있다.

다섯째, 우리의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들어보고 그 명령에 따르면 될 것이라고 보는 것이 칸트의 입장이라 할 수 있다. 대중교통은 그야말로 대중(public)을 위한 교통이기 때문에 그 사상과 철학을 철저히 이행해서 대중을 위해 지원하는 논리에 순수하게 충실해야 한다고 본다. 공직자분들은 물론 회사들의 도덕적 해이(moral hazard)’는 없어야 한다. 일반시민들도 불법적무임승차(free rider)’를 하면 안된다. 누가보아도 엄격하며, 곧은 규칙을 만들고 따라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우리 마음 깊은 곳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들으면서.

여섯째, 구조적으로 가난하거나 사회적 약자가 될 수 밖에 없었던 사람에게 적극 지원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존 롤즈의 사회정의론적(social justice) 입장에서 보면 대중교통은 사회적 약자에게는 반드시, 그리고 우선 지원해야 하는 매체가 된다. 존 롤즈는 우선 자유와 평등은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마땅하다고 전제를 하고 있다. 그러다 보아도 사회적으로 약한 사람이 나타나는 바, 예를 들어 가난한 사람, 장애를 가진 분, 외국인과 다문화가족, 어르신, 임산부 등에게는 대중교통이 적극적으로 봉사를 해야한다고 본다. 국가와 지방정부는 아낌없이 지원을 해야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사회의 안전과 지속가능의 보장, 위화감과 분리현상해소, 사회문화적 요소에 의한 계급형성의 구조적 차단 등을 위해서 이 롤즈의 사회정의론적 대중교통 해석은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일곱째, 대중교통의 원래 목적에 부합하고, 공동체의 발전을 위해 필요한 사업이라면 적극 지원해야 한다는 샌댈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에서 보면 버스회사의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역주민에게 지역이 주는 명예와 안위, 사회생활 보장을 위한 대중교통에 대해서 지원해주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다. 목적론적 존재론과 공동체주의의 만남이라 할 수 있다. 이제 우리 시민들은 정부나 전문가에 비교하더라도 교통관련 사상이나 공학적 지식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구체적으로 알고 현장의 상황을 더 잘 파악하고 있을지 모른다. 대중교통이 가져야할 원래 목적에 대해는 알고 있고, 지원에 대한 근거도 인지하는 고급시민성을 이미 확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부분에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낀다.

제주의 대중교통에 대한 지원의 원래 목적은 대중을 위한대중교통(public traffic)’에 있다. 그 목적에 부합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 제주의 대중교통이 그 목적에 부응하는 측면이 증가하고 있다면 그 규모와 지원을 확대시켜야 한다. 이용객의 증가하고 사회적 편익과 공리적인 측면이 증가하고 있으나 작으면서 보이지 않는 누수가 있다면 그것은 지속적으로, 제도적으로, 시민성으로 관리해내야 한다. 공공부문은 전문가의 전문영역을 잘 듣고, 경영과 운영상의 문제해결을 위한 노력을 할 때 서민들은 편안해 할 것이다. 그렇게 하면 제주도는 살기좋은 곳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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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순양 2019-08-30 07:52:18
모두가 살기위한 제주도를 위해 도덕적책임?을 다하시는 교수님을 늘 지지합니다!